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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운령 진흥왕 순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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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는 신라 진흥왕이 568년 함경남도 이원군 마운령 지역을 순수하고 돌아간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16세기 말에 발견되었으며, 한백겸은 고려 윤관의 비로 소개했으나, 1929년 최남선에 의해 진흥왕 순수비임이 고증되었다. 화강석으로 제작되었으며, 앞면 26자씩 10줄, 뒷면 25자씩 8줄, 총 415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비문에는 진흥왕의 업적, 순수 목적, 비 건립 연유, 왕 수행 인물 등이 기록되어 있다. 현재는 함흥시 사포구역 함흥본궁에 보관되어 있으며, 신라사, 서예, 이두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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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운령 진흥왕 순수비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문화재 정보
이름마운령 진흥왕 순수비
로마자 표기Maunnyeong Jinheungwang Sunsubi
1929년 마운령 신사비 발굴시의 모습. 옆에는 당시 경성제국대 예과 부장이자 발굴단장이었던 [[오다 쇼고]].
1929년 마운령 신사비 발굴시의 모습. 옆에는 당시 경성제국대 예과 부장이자 발굴단장이었던 오다 쇼고.
국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유형국보
번호111
주소함경남도 함흥시 동흥산구역 함흥력사박물관
시대신라

2. 역사

16세기 말에 발견된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는 17세기한백겸이 《동국지리지》에 고려 윤관의 비로 소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1929년 최남선에 의해 진흥왕 순수비라는 사실이 밝혀졌다.[1]

비석은 화강석으로 네모나게 다듬어 만들었으며, 비몸돌의 높이는 1.36m, 너비는 45cm, 두께는 30cm이다. 갓돌은 배집형식으로 되어 있다. 비에는 앞면에 26자씩 10줄, 뒷면에 25자씩 8줄, 모두 415자의 글이 새겨져 있다. 앞에서 10자, 뒤에서 19자가 깎여 없어졌거나 잘 보이지 않는데, “황초령 순수비”에 의하면 앞의 10자 가운데 7자까지는 알 수 있으므로 결국 393자를 읽을 수 있다. 글씨체는 해서체이다.

비문에는 진흥왕의 업적과, 변방을 돌아보는 목적, 그리고 비를 세우게 된 연유 등이 적혀 있고, 마지막 부분에는 왕을 따라갔던 사람들의 출신과 벼슬,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 비는 현재 남아있는 진흥왕 순수비 가운데 비문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라 제24대 왕인 진흥왕이 568년 8월에 이곳을 돌아보고 간 것을 기념하여 세운 이 비는 당시의 역사서예, 이두문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1]

2. 1. 발견

16세기 말에 발견되어 17세기한백겸이 《동국지리지》에 고려 윤관의 비로 소개하였으나, 1929년 최남선이 함경남도 이원군 마운령 만덕산 산중에 파묻혀 있던 것을 찾아낸 후 진흥왕 순수비라는 사실을 고증하였다.[1] 지금은 함흥시 사포구역 소나무동에 있는 함흥본궁 뜰안에 옮겨져 있다.[1]

2. 2. 최남선의 고증

1929년 최남선이 함경남도 이원군 마운령 만덕산 산중에 파묻혀 있던 것을 찾아 진흥왕 순수비임을 고증하였다.[1]

2. 3. 현재 위치

1929년 최남선이 함경남도 이원군 마운령 만덕산 산중에 파묻혀 있던 것을 찾아내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혀냈다. 현재는 함흥시 사포구역 소나무동 함흥본궁 뜰 안에 옮겨져 보관되어 있다.[1]

3. 형태 및 내용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는 화강석으로 만든 비석으로, 비문에는 진흥왕의 업적, 변방 순수 목적, 비 건립 연유, 수행 인물들의 출신, 벼슬, 이름 등이 기록되어 있다. 비석의 형태와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의 형태 및 내용
구분내용
재질화강석
형태네모나게 다듬은 형태, 갓돌은 배집형식
크기비몸돌 높이 1.36m, 너비 45cm, 두께 30cm
글자 수앞면 26자씩 10줄, 뒷면 25자씩 8줄, 총 415자 (393자 판독 가능)
글씨체해서체
비문 내용진흥왕의 업적, 변방 순수 목적, 비 건립 연유, 수행 인물 정보


3. 1. 재질 및 형태

비석은 화강석으로 네모나게 다듬어서 만들었는데, 비몸돌의 높이는 1.36m, 너비는 45cm, 두께는 30cm이며, 갓돌은 배집형식으로 되어 있다.[1] 비에는 앞면에 26자씩 10줄, 뒷면에 25자씩 8줄, 모두 415자의 글이 새겨져 있다.[1] 앞에서 10자, 뒤에서 19자가 깎여 없어졌거나 잘 보이지 않는데,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에 의하면 앞의 10자 가운데 7자까지는 알 수 있으므로 결국 393자를 읽을 수 있다.[1] 글씨체는 해서체이다.[1]

3. 2. 비문 내용

비문은 해서체로 새겨져 있으며, 진흥왕의 업적과 변방 순수 목적, 비 건립 연유, 수행 인물들의 출신, 벼슬, 이름 등이 기록되어 있다. 비석에는 앞면에 26자씩 10줄, 뒷면에 25자씩 8줄, 모두 415자가 새겨져 있다. 이 중 앞에서 10자, 뒤에서 19자가 깎여 없어졌거나 잘 보이지 않으나, 황초령 순수비를 통해 앞의 10자 중 7자는 판독 가능하여 총 393자를 읽을 수 있다.[1] 이 비는 현존하는 진흥왕 순수비 중 비문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1]

4. 배경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는 본래 함경남도 이원군 동면 운시산(속칭 만덕산) 봉우리 아래에 있었으나, 현재는 함경남도 함흥시 사포구역 소나무동에 위치한 함흥 본궁(本宮) 본관(本館)에 보관되어 있다. 이 비는 한백겸, 김정희 등이 언급했으나 큰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1929년 최남선의 조사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1]

4. 1. 최초 위치

본래 함경남도 이원군 동면 운시산(속칭 만덕산) 봉우리 아래에 있었다.[1]

4. 2. 학계의 주목

일찍부터 학계에서는 한백겸, 김정희 등이 주목하여 언급했으나, 뚜렷한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다만 현지에 살던 강필동(姜必東)이 약간의 기록을 남겼을 뿐이었다.[1]

4. 3. 최남선의 조사

1929년 9월, 최남선이 전적(典籍)조사 차 함경남도 이원군을 방문하여 현지 유지들의 협조를 얻어 본격적으로 조사하고 학계에 보고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1] 비석의 재질은 화강암이며, 높이 165cm, 너비 65cm, 두께 약 30cm이다. 비석의 앞면에는 10행에 행마다 26자, 뒷면에는 8행에 행마다 25자가 새겨져 있다. 마모가 비교적 심하지 않아 대부분의 글자를 판독할 수 있다.[1]

5. 역사적 의의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는 신라 진흥왕이 568년 8월에 이 지역을 방문한 것을 기념하여 세워진 비석으로, 당시의 역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1]

5. 1. 서예 및 이두 연구

비문에는 진흥왕의 업적, 변방을 돌아보는 목적, 비를 세우게 된 연유 등이 적혀 있고, 마지막 부분에는 왕을 따라갔던 사람들의 출신, 벼슬,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 비는 현존하는 진흥왕 순수비 가운데 비문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라 제24대 왕인 진흥왕이 568년 8월에 이곳을 돌아보고 간 것을 기념하여 세운 이 비는 당시의 역사, 서예, 이두문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1] 글씨체는 해서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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